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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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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재성당

되재성당

주소
[55303] 전북 완주군 화산면 승치로 477 (승치리, 되재성당)
문의전화
010-3603-8688, 010-4766-0321
주변 명소/관광지
경천저수지, 화암사
조선 말 혹독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신자들은 산속 깊은 되재를 넘어 교우촌을 형성하고 성당을 세웠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두 번째로 새운 성당이며 최초의 한옥성당인 되재성당이다.
성당은 한국전쟁때 전소되어 1954년에 공소건물만 다시 세워 자리하고 있다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한옥성당의 독특한 구조가 아름다운 곳이다.

길의 끝에 구원이 있기를



쓰다    강변구 (2021 완주공유문화탐사단)

가다    되재성당 (완주군 화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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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라면 한 번은 가봐야 할 곳


되재성당(되재를 자꾸 ‘돼지’라고 쓴다). 완주에 내려온 지 2년쯤 되는데, 처음 왔을 때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아내 회사가 서울에서 전주로 옮겨오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내려왔다. 그해 2월에 코로나가 터져서 6살 딸아이와 나는 석 달을 온종일 함께 보냈다. 유치원 개학이 1주일씩, 2주일씩 밀리더니 5월에야 문을 열었다. 그 석 달 동안이 지금 돌아보면 아이와 함께 완주의 여러 곳을 다녀 본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는 완주관광지도를 방에 붙여 놓고 가야 할 곳에 동그라미를 쳤다. 아침 먹고 애 씻기고 입혀서 데리고 나가려면 점심 전까지 바빴다. 방 탈출 게임이란 게 있다는데 아마 아이 둘 데리고 외출하는 미션이 여느 방 탈출보다 어렵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그렇게 아이와 함께 비비정에 가고, 송광사에 가고, 고산천에 갔다. 아이가 하루는 “아빠 오늘도 모험 가야 돼? 그냥 집에 있으면 안 돼?”하며 투덜댔다. “모험은 매일 가야 해. 그래야 용감한 어린이가 되는 거야.” 무조건 야외로 나가지 않으면 그날 하루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아이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 수도권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집 안에서만 버티었다고 하는데, 정말 생각만 해도 진땀이 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가족은 완주에 내려와서 조금이나마 덜 힘들게 그 시기를 보낸 셈이다. 



쇠고기 사준다고 꼬셔서 출발


되재성당. 내비에 찍어보니 딱 50킬로다. 경로는 고산 지나서 화산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또 더 깊이 들어가서, 길 끝이었다. 말 그대로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있다. ‘아이랑 같이 갈 수 있을까.’ 순간 자신이 없어졌다. 이제 곧 8살이 되지만 왕복 도합 100킬로를 차에 태워서 가야 했다. 혼자 가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그러면 온종일 아내가 혼자 애를 봐야 한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야~ 오늘 내가 고산에서 소고기 쏜다. 가자!” 아이는 고산 한우협동조합 매장에서 고기를 구워주면 냠냠 오물오물 잘 먹고, 나는 냉면으로 모자란 배를 채우곤 했다. 



내가 천주교인이 된 사연

난 강베드로다. 한 5년 전쯤인가 파주 운정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때 육아휴직 기간이었는데, 3개월 동안 성당에 나가 교리 수업을 받았다. 그때 교리 선생님이 60대 중반쯤 되시는 여성분이셨다. 품이 넓었고, 검은 뿔테 안경에 앞니가 약간 벋었는데 웃는 모습이 참 따뜻한 분이었다. 그때 내가 육아휴직을 한 이유는 육아 외에도 회사에서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화, 울분이 마음속에 꽉 차 있었다. 그 사연을 풀어내자면 끝이 없겠으나 믿었던 동료들에게 느낀 배신감과 나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 원인이었다. 수치심, 배신감은 시시때때로 분노가 되어 폭발했다. 한동안은 그런 분노를 힘 삼아 더 열심히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유사 휘발유를 넣고 달리는 자동차 같았다.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그냥 내달렸다. 그러다 덜컥 마음이 고장이 나버렸고, 회사에서 멍하니 아무것도 못 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직장을 잃을 위기에 가까워졌을 때 나는 용케 휴직이라는 임시 피난처로 도망칠 수 있었다.

 


변치 않을 누군가에게 소속되고 싶어서


예비 신자 시기가 가장 신앙심이 깊다고 누가 농담처럼 했던 말이 진짜였다. 그때 파주 운정에 한창 신도시가 조성되고 아파트가 들어설 때라 신자 수가 정말 많았다. 본당이고, 유아실이고 간에 도무지 미사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본당에는 아이가 칭얼거려서 있지를 못했다. 2년 정도 신부님 강론도 들리지 않는 유아실에서 있으면서 신앙을 싹틔워야 할 중요한 시기를 놓쳐버렸다. 그런 채로 완주로 훌쩍 내려왔다. 내려오고 나서는 코로나 때문에 성당에 못 나갔다. 세례를 받을 때 가장 마음에 좋았던 점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의 울타리 안에 들어간다는 교리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20대 후반부터 오로지 회사란 조직에 소속감만 가지고 살다가 실패를 맛본 그때,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분에게 소속된다는 느낌이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소속감마저 불안하다. 과연 하느님이 지금도 나를 품에 안아 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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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두 번째로 일찍 생긴 성당


집에서 차로 30분쯤 달려 고산을 지나 화산면에 들어서자 길 양옆으로 소 농장이 보인다. 누런 소를 실물로 처음 보는 아이가 “엄마 저거 진짜 소야?”라고 놀라워했다. 한참을 올라가다 찻길이 아닌 것처럼 좁은 길이 이어졌다. 그 길을 천천히 지나자 문득 넓은 곳이 나오고, 계단 위로 우뚝 선 종탑과 한옥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두 팔 벌려 넓은 품으로 맞이해 주시는 예수님도 계셨다. ‘그래 오길 잘했어. 하느님은 항상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거야.’ 바깥 풍경들을 사진에 담고 성당 안을 둘러보았다. 본당 한가운데 나무로 벽을 세워서 왼쪽에는 남자, 오른쪽에는 여자가 앉도록 해 놓았다. 안내를 읽어보니, 되재성당은 최초의 한옥 성당이면서, 서울 약현성당에 이에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1891년) 생긴 성당이라 한다. 어떻게 이 심산유곡에 전국에서 두 번째로 성당이 생길 수 있었을까? ‘되재’는 말 그대로 ‘고개를 넘기가 고되다’는 뜻이다. 고산은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넘어오는 길목에 있는 지역이고, 되재는 고산에서 산으로 깊이 들어가서 숨을 수 있는 장소였다. 1701년 신유박해 이후 전라도에 천주교 신자가 크게 늘었을 때, 이곳 고산 주변 곳곳에 신앙촌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런 배경에서 되재에 큰 규모의 성당이 세워질 수 있었을 것이다. 되재에서 산 하나는 넘으면 충정도 땅이다. 길 끝에서 구원을 찾았던 사람들은 그것이 길의 막다른 끝 아니라 다른 땅으로 연결되는 작은 통로였음을 역시 알았을 것이다.



변함없는 나의 울타리


제대 앞에 서서 십자고상을 보며 기도를 했다. ‘하느님, 오랜만입니다. 그간 성당에 너무 오래 나오질 못했네요.’ 그리고 사도신경을 외웠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으악, 벌!”

아이가 심상찮았다. 엄지손가락을 꼭 쥐고는 너무 아파 못 참겠다며 악쓰며 울기 시작했다. 아이 치마에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말벌이 붙어 있었다. 깜짝 놀라 손으로 쳐내고 손가락을 보니 이미 발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아이가 봉헌주머니에 엄마가 쥐어준 헌금을 넣으려고 손을 쑥 넣었을 때 그 속에 말벌이 있었나 보다. 다행히 제대로 쏘인 게 아니라 살짝 찔린 정도 같았다. 

“엄마,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죽는 거야?”

아이는 ‘곤충’, ‘질병’, ‘응급상황에서 살아남기’ 같은 학습만화를 많이 본 탓에 더럭 겁을 먹었다. 

‘아니야, 안 죽어! 벌에 쏘인다고 죽지는 않아. 병원 가서 약 바르면 돼.’

‘진짜 약만 바르는 거지? 혹시 수술하면 의사 선생님이 미리 말해 주면 좋겠는데.’

아내는 대학병원 응급실에 전화를 하고, 아이는 부은 손가락을 부여잡고 겁먹은 얼굴로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고 있었다. 곧바로 차에 타서 내리막을 타고 내질렀다. 어쩐지 혼나고 쫓겨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천주교의 울타리 안에 있는 걸까. 아니 그 어떤 울타리 안에라도 있기나 한 걸까? 기분이 울적했다. 회사를 나와 낯선 곳으로 이사를 왔으니 직장이나 지역에 소속된 것도 아니고, 친구들과도 멀리 떨어져 버렸다. 나는 경계 없이 끝없는 벌판에 서 있는 게 아닐까. 


전주 시내에 들어서니 아이가 진정되어 갔다. 마음먹고 찾아갔다가 도착한 지 십여 분도 안 되어 되돌아온 이번 나들이가 우스웠다. 아내도 나와 같은 기분이었는지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종알대기 시작한다. 그때 알았다. 내가 세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후퇴했을 때도, 세상 길의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고 느껴질 때도 나는 변함없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속해 있을 거라는 걸.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다른 세상으로 나갈 통로를 발견할 거라는 사실을. 


생의 막다른 곳에 다다른 듯 막막한 기분이 든다면, 되재성당을 한번 찾아가 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이 성당은 길 끝에 있지만 그곳이 끝이 아님을 몸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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