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치전적지
- 주소
- [55346]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16
- 주변 명소/관광지
- 위봉사, 오성한옥마을
주 전투지는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덕봉마을에서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부목마을로 넘어가는 고갯길로 지금의 웅치길(덕봉길)이다.
1979년도에 세워진 웅치전적비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산 18-1에 있다.
완주 역사의 숨결을 찾아가다
쓰다 문여정 (2021 완주공유문화탐사단)
가다 웅치전적비 (완주군 소양면)
웅치전적비에 오르다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싱그러운 계절에 우리 가족은 웅치전적비를 찾았습니다. 초등학생 딸이 학교에서 골든벨 현장학습으로 웅치전적비를 다녀와서는, 우리가 사는 곳 가까이 문화재가 있다고 같이 가보자고 하던 터였습니다. 이곳의 역사성을 알고 가는 곳이니만큼 그 옛날 선조들의 고생과 고마움을 느끼며 산을 오를 수 있었습니다.
웅치전적비에 오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저희는 유치원 아이가 있기에 차를 타고 옛 곰티재를 넘어가는 코스를 선택했습니다.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 두목마을에서 역사 탐방로 안내 표지판이 있는 곳을 지나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원신촌이라는 마을이 나옵니다. 마을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계절마다 아름다운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원신촌에서 곰티재를 넘어가는 모든 길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입니다. 그래서인지 예스러운 느낌이 많이 납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차가 다녔던 길이기 때문에 승용차로 올라가는데 전혀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다만, 산길이 구불구불하고 깊게 파여있는 곳도 있어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운전해야만 합니다. 올라가다 보면 익산-장수를 잇는 고속도로의 교량을 볼 수 있습니다. 오래된 비포장 길을 달리는 동시에 머리 위로 있는 거대한 교량에 차들이 쌩쌩 달리는 것을 보게 되다니, 과거와 현재가 이곳에 공존하는 느낌이 듭니다.
비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이내 깊은 숲으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창문을 내리면 시원하고 청량한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을 상쾌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나뭇잎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환한 빛이 바람결에 따라 수시로 반짝입니다. 그렇게 천혜의 자연을 느끼며 10분쯤 달리다 보면 곰티재에 도착하게 됩니다. 곰티재에 주차하고 조금만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면 자랑스럽게 자리잡고 있는 웅치전적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웅치전적비 앞에 적힌 안내문도 읽어보고 그 당시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조상님들께 감사의 인사도 드렸습니다.
웅치전적비가 있는 곳에서 실제 전투가 있었던 장소를 보기 위해서는 덕봉길이라 불리는 등산로를 1.8km 정도 올라가야 합니다. 조금 올라가면 능선을 따라 전주와 진안을 오가던 옛길이 나오는데 그곳이 웅치전투의 현장입니다. 구불구불 산길을 차로 올라와서 웅치전적비를 보고, 천천히 등산로를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그 옛날 차도 없이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최소한의 양식만으로 버티며 어떻게 이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 대부분은 전문적 훈련도 받지 않은 민초이었을 텐데, 그 힘겨운 길을 걸어 올라가 왜군과 전투를 치루며, 이 땅을 지켜주셨다는 생각에 절로 감사함 느껴집니다. 왜군들이 우리 선조들의 충성심과 용맹함에 감탄하여 조선군의 시신을 묻고 추모하는 뜻을 담아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 忠肝義膽)>이라고 쓴 푯말을 세웠다는 것은, 이 길을 걸었던 왜군에게도 힘겨웠던 전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적군이었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 얼마나 용맹했으면 푯말을 세워 존경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했을까요. 약 430년 전 여름, 가족들과 헤어져 죽을 각오로 험난한 산길을 오르고, 배고품과 더위를 이겨내며 꿋꿋이 지켜냈던 이곳을, 저희는 울긋불긋 물든 단풍을 만끽하며 걸었습니다. 선조들의 희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 이 아름다움에 더욱 깊이 감사했습니다.
웅치전적지의 역사적 의미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에서 진안 부귀면을 넘어가는 옛 곰티재에 전라북도 기념비 25호인 웅치전적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웅치전적비가 세워져 있는 웅치전적지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전투를 벌였던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일원을 일컫습니다.
음력 1592년 4월 13일 조선에 침략한 왜군은 동년도 6월 말경에 전라북도를 제외한 조선의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조가 왜군을 피해 북쪽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바닷길이 막혀 전쟁이 길어질 것 같아 보이자, 왜군들은 곡창지대인 전라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1592년 7월 8일 새벽, 왜장 고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끄는 왜군이 전주로 진출하기 위해 웅치를 공격해 왔습니다.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이 이끄는 조선군은 진안 세동리부터 완주 신촌리까지 방어선을 구축하고 왜군과 혈전을 벌였습니다. 결사적으로 항전하였지만 왜군의 지속적인 공격에 1차, 2차 방어선이 무너지고 최후 방어선인 웅치 정상부에서 정담을 비롯한 많은 장정들이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 「징비록」 등 여러 사료에 따르면, 당시 전투가 끝나고 왜군들은 조선군의 충성심과 용맹함에 감탄하여 조선군의 시신을 묻고 추모하는 뜻을 담아 <조조선국충간의담>이라고 쓴 푯말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후 7월 9일 웅치를 넘은 왜군은 안덕원 근처까지 진출했지만, 웅치 전투에서 입은 전력의 심각한 손실과 안덕원 전투에서 황진에게 패배, 이정란 장군의 전주부성 방어태서 등 때문에 전의를 상실하고 7월 10일 진안으로 철수함으로써 전주부성 점령에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웅치전적지 일원에서 일어난 격전은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은 가장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이후 왜군의 전라도 점령 의욕은 꺾이게 됩니다. 결국 웅치·이치 전투가 있었기에 전라도가 지켜졌고, 이로 인해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이 승기를 잡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돌아가신 선조들의 넋을 기리고 감사를 표하기 위해 웅치전적비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16